나는 ‘내 것’을 추구하는 편이다. 어딘가에서 일하면 그곳이 만들고 파는 것을 내 일처럼 여기고 싶다. 그렇게 느낄 때는 자부심이 생긴다. 반대로 내 일이라는 감각을 잃으면 매너리즘이나 번아웃에 가까워지고, 떠나고 싶은 마음도 커진다.
한 스타트업에서 두 창업자와 일하기 시작했을 때 그 갈증이 다시 나타났다. 창업자들은 시간과 자원을 온통 이 일에 쏟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이 일을 그들만큼 열심히 하고 있는가.
나도 그들만큼 목마른가.
나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처음에는 거리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처럼 일하고 그들처럼 절박해야 내 일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질문에는 빠진 것이 있었다. 창업자와 구성원은 맡은 책임과 감수한 위험, 결정할 권한이 다르다. 내가 그들이 될 수 없는 것은 열의가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상대의 고민을 온전히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나는 이것을 ‘거리의 한계’라고 부른다. 한계를 인정하는 일은 포기가 아니다. 어디까지 가까워질 수 있고 어디부터는 상대의 몫인지 알아보는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창업자들과의 거리를 좁힌다는 것은 무엇일까. 밤을 새우는 횟수를 맞추는 일이 아니다. 결정의 이유를 묻고, 내가 맡은 일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이해하고, 책임질 수 있는 범위를 조금 더 분명하게 만드는 일에 가깝다. 시키는 일만 기다리던 자리에서 필요한 질문을 먼저 꺼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반대로 건강이나 생활이 무너지고도 창업자처럼 보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틴다면 멈춰야 한다. 권한은 그대로인데 책임만 끝없이 늘어나는 경우도 거리 좁히기가 아니다. 그것은 역할의 차이를 지운 채 부담만 옮기는 일일 수 있다.
나는 그들이 될 수 없다. 그들의 일이 온전히 내 일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한 뒤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보인다. 한 업무의 목적을 더 가까이 이해하고, 내 판단을 보태고, 맡은 결과를 끝까지 확인하는 일이다.
내 것에 대한 갈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 갈증을 창업자와 나를 비교하는 데 쓰기보다, 내가 선 자리에서 조금 더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데 쓰려고 한다. 없앨 수 없는 거리를 인정하면서도 한 걸음 가까워지는 것. 내가 시작하려는 거리 좁히기는 그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