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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는 타인을 밀어내지 않을 공간이다

저자: 고경만 (해경, haegyung) · 출처: 브런치 채널 · 최초 발행: 2016-01-09 · 개선 정본 판본

한 장면을 상상해 본다.

낡은 외투를 입은 남자가 바람 센 겨울 길을 걷는다. 길에서 만난 옛 동창은 그 차림을 보고 남자의 형편을 짐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길게 늘어놓는다. 남자의 사정을 묻기보다 겉모습으로 삶을 재단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루를 버티기도 빠듯한 때였다면 동창의 말이 깊은 상처가 되었을지 모른다. 반대로 이미 자기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냈을 수도 있다. 같은 말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여유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내게 여유는 남는 시간만을 뜻하지 않는다. 마음이 숨을 쉴 공간, 당장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물질적 버팀, 타인의 말을 곧바로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간격을 함께 가리킨다.

여유가 줄면 평소라면 넘겼을 일도 문제가 된다. 기다림은 모욕처럼 느껴지고, 작은 실수는 무시당했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여유가 부족한 사람이 반드시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각박해지는 순간, 성격을 탓하기 전에 무엇이 부족해졌는지 물어볼 수는 있다.

시간이 모자란가. 돈에 대한 불안이 커졌는가. 오래 참고 있어 마음의 자리가 사라졌는가.

이 질문은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한 조직이 다른 조직을 몰아붙이고, 그 압박이 더 약한 사람에게 옮겨 가는 장면을 우리는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부당함을 ‘여유가 없어서’라고 설명하면 책임까지 흐려진다. 여유의 부족은 타인을 해칠 면허가 아니다. 오히려 압박이 아래로 흘러가는 순간을 더 일찍 알아차리기 위한 단서에 가깝다.

그래서 여유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느긋하게 살자는 말만은 아니다. 내가 무엇에 쫓기고 있는지, 그 조급함을 누구에게 넘기고 있는지 살피는 일이다. 개인의 여유를 회복하는 일과 타인의 여유를 빼앗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일도 함께 놓여 있다.

겨울 길의 남자는 낡은 외투 하나로 판단받았다. 그를 바라보던 동창에게 부족했던 것은 어쩌면 돈이나 시간이 아니라, 모르는 삶을 모른 채로 두는 마음의 간격이었을지 모른다.

여유는 많이 가진 사람의 장식이 아니다. 타인을 너무 빨리 재단하지 않게 해 주는 작은 공간이다. 그 공간에 관심을 두는 순간, 삶을 바꾸는 첫 질문이 생긴다.

독자의 맥락과 여백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른 당신의 장면은 무엇인가요? 질문과 선택의 맥락을 자기 노트에 기록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