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불편함에서 시작해서, AI 시대의 질문까지
“제품은 사용하기 쉬워야 한다.” “품질은 제품이 책임져야 한다.” 이런 문장에는 자주 Must라는 말이 붙습니다. 그래야 한다는 뜻을 넘어, 무엇이 무엇보다 먼저여야 하는지를 정합니다. 나는 그 말이 오래 불편했습니다.
불편함의 정체를 들여다보니 서열이 보였습니다. Must는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질서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어떤 질서도 맥락 밖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그 말을 만든 사람의 시대와 필요, 그가 겪은 문제와 환경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도 영원한 법칙이라기보다 특정 시대가 중요하게 여긴 가치의 언어일 수 있다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시대마다 달라진 먼저의 기준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에게 건축은 견고함(Firmitas), 유용성(Utilitas), 아름다움(Venustas)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나는 이 순서를 무너지지 않는 안정이 먼저이고, 쓰임과 아름다움이 뒤따른다는 가치로 읽었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Must는 “안정이 먼저다”입니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의 루이스 설리번은 “형태는 언제나 기능을 따른다. 이것이 법칙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초고층 건물과 생산의 효율이 중요한 환경에서는 기능이 형태보다 앞서는 질서가 설득력을 얻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당시 디자인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형태와 기능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능과 형태를 대립시키기보다 결합하려는 움직임입니다. 그럼에도 기능이 없는 형태는 부족하다는 그림자가 남아 있다고 나는 읽었습니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선언은 모든 시각 예술의 목표를 건축과 연결했습니다. 여기서 Must는 개별 예술보다 기능적 전체를 앞세우는 가치로 보입니다. 디터 람스에게는 정직함과 절제가 중요했습니다. 좋은 디자인은 실제보다 더 혁신적이거나 강력해 보이도록 꾸미지 않아야 하며, 가능한 한 적게 디자인해야 한다는 원칙을 남겼습니다.
도널드 노먼의 관점에서는 사용자의 이해가 앞에 놓입니다. 좋은 디자인은 조용히 필요를 돕고, 사용자가 자신을 탓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에 이르면 기준이 다시 이동합니다. 어떤 패턴도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다른 패턴들의 지지를 받을 때 살아난다는 말에서, 나는 서로 다른 Must의 방향을 읽었습니다.
나의 Must는 관계가 먼저다
여러 관점을 이어 놓고 보니 내가 불편해했던 것은 Must라는 단어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내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이 하나의 보편 법칙처럼 들리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필요한 것도 달라지고, 필요가 달라지면 먼저 지켜야 할 가치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언어에서는 관계와 상호작용이 먼저다.
이 말은 기능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태와 기능, 사용자와 만든 사람, 시스템과 생활이 서로 영향을 주는 장면을 먼저 보겠다는 뜻입니다. 같은 기능도 누구와 어떤 환경에서 만나는지에 따라 다르게 작동합니다. 그 순간의 나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고, 그 상호작용도 그때의 조건 속에서만 생깁니다.
나는 이 과정을 물리학의 상호작용에 대한 직관으로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세계와 나는 계속 주고받으며 이해합니다. 다만 이 비유가 과학적 설명을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쓰는 문장 역시 나의 가치관과 필요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관계를 먼저 둔다는 말도 또 하나의 조건부 관점입니다.
AI 시대의 새로운 Must
형태가 거의 보이지 않는 대화형 인터페이스와 알고리즘 속에서 Must는 무엇일까요? AI 시대의 디자인은 어떤 관계를 먼저 보호해야 할까요? 설명가능성과 신뢰성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 가치를 낳은 필요와 욕망은 무엇이었을까요?
아직 이 질문에 하나의 답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관계의 상호작용을 단서로 다음 질문을 찾아가려 합니다. 그 관찰 없이 새로운 시대의 법칙을 선언하면, 과거의 Must를 반복할 뿐입니다.
내가 찾고 싶은 단서는 관계들의 상호작용입니다. 누가 누구와 무엇을 주고받는지, 한 요소의 변화가 다른 요소의 선택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 관계에서 어떤 필요가 드러나는지를 보려 합니다. Must를 고정된 서열로 외우기보다, 지금 이 관계에서 무엇을 먼저 지켜야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형태와 기능의 관계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관계가 형태와 기능을 함께 만들 수 있고, 새로운 필요가 우리가 지켜야 할 순서를 다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불편했던 말은 그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듯했기 때문에 불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