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를 ‘꼰대’라고 부르며 비꼬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말이 틀림과 옳음을 정확하게 구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생각의 다양성을 배제하는 방식도 싫다.
흔히 꼰대질이라고 부르는 상황은 선배가 후배에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했는데, 서로의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일 수 있다. 선배의 말이 옳은 조언인지, 전달 방식이 상대를 닫게 했는지, 후배가 듣기 싫은 말을 모두 거부한 것인지는 따로 살펴봐야 한다. 그런데 대화가 실패하면 한 사람을 곧바로 꼰대라고 부르는 일이 생긴다.
그래서 이 말은 닫힌 언어가 되기 쉽다. 잔소리를 듣기 싫은 후배가 선배에게 붙이는 말일 수도 있고, 선배의 말투와 권력을 비판하려는 말일 수도 있다. 같은 단어 안에 서로 다른 판단이 들어가면, 무엇이 틀렸고 무엇을 고칠지 확인하기 어려워진다. 진짜 상대방에게 닫혀 있는 쪽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세대 탓도 같은 방식으로 닫힌다
꼰대라는 말과 함께 세대별 의견 차이를 갈등의 원인으로 설명하고 책임을 지우는 시각도 있다. 이 시각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세대 차이가 실제로 존재할 수는 있지만, 세대라는 이름이 사람의 경험과 상황을 대신하는 순간 대화가 멈추기 때문입니다.
“그 세대라서 그래.” “요즘 사람이라서 그래.” 이런 말은 빠르게 편을 나눈다. 하지만 갈등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은 편을 나누는 속도가 아니라, 어떤 말을 했는지,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 어떻게 전달했는지를 보는 일입니다.
대화가 막힌 장면에서 세 가지를 따로 물어보고 싶다.
첫째, 주장은 무엇인가. 상대가 실제로 말한 내용을 낙인어 대신 한 문장으로 적어본다.
둘째, 근거는 무엇인가. 선배의 경험인지, 후배의 현재 조건인지, 아니면 서로 확인하지 않은 추측인지 나눈다.
셋째, 전달 방식은 어땠는가. 내용이 맞더라도 명령이나 조롱으로 전달되면 대화는 닫힐 수 있다. 반대로 말투가 부드럽다고 해서 내용이 자동으로 옳아지는 것도 아니다.
이 세 질문은 누구의 편을 들기 위한 절차가 아니다. 낙인을 붙이기 전에 대화의 실패가 어디에서 생겼는지 한 번 더 보려는 작은 멈춤입니다.
경험과 나이는 옳음의 증거가 아니다
세대 차이와 꼰대로 단절을 설명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단절을 촉진하는 시각으로 단절을 대하면 더 단절될 뿐입니다.
더 많은 경험은 죄가 아니며 더 적은 경험도 죄가 아니다. 더 젊은 나이가 옳다는 징표가 되지 못하듯, 더 많은 나이도 옳다는 징표가 아니다. 경험은 판단의 자료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결론은 아니다. 젊음은 새로운 조건을 알려줄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상대의 경험을 무효화하지도 않는다.
선배의 조언이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후배가 그 말을 듣는 방식이 힘들 수 있다는 사실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어느 한쪽을 지워야만 다른 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향한다는 것
피곤하고 기분이 나쁘더라도 서로를 향할 때, 우리는 공존의 길에 들어선다. 여기서 서로를 향한다는 말은 무조건 참으라는 뜻이 아니다. 잘못된 말과 권력의 압박을 그냥 넘기라는 뜻도 아니다.
내가 들은 말의 주장과 근거와 전달 방식을 구분하고, 상대에게도 같은 구분을 요청하는 일입니다. 대화가 다시 실패하면 멈추고, 안전이 위협받는 관계라면 거리를 두는 일도 포함한다.
연약한 인간은 공존의 길을 바탕으로 생존할 수밖에 없다. 누가 더 옳은 세대인지 결정하는 일보다, 지금 이 갈등에서 무엇을 확인하고 무엇을 다시 말할지 선택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낙인으로 닫힌 말을 조금 열어보는 것. 그 정도의 수고가 서로를 향하는 첫걸음일 수 있다.